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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影堂의 건립 경향과 禮學확산 이후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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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영당은 보편적인 의미에서 제향 공간에 상을 봉안한 건물을 지칭한다. 이러한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늦어도 통일신라시기부터였던 것을 당대 사찰의 금석문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이처럼 동아시아의 제향 공간에서 상을 봉안하는 전통을 고대 사찰의 불전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실제로 조선중기 이후 위패를 봉안하는 유교적 전통이 확산되기 전까지는 제향 공간에서 위패 대신 상을 봉안하는 경우가 빈번했다.조선중기 이후로는 불교의 유습이라는 이유로 사당에 봉안된 상을 파괴하고, 위패로 대체하는 일이 진행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중기 이후에 건립된 서원들에서도 배향자의 상을 봉안하기 위해 영당을 두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문중에서 영당을 지어 운영했던 사례도 많다. 따라서 영당의 건립 자체는 유교적 이념을 중시했던 조선중기 이후에도 어느 정도 용인되며 지속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위패를 봉안하는 사당과 상을 봉안하는 영당의 구분이 명확해졌으며, 주된 입지 또한 사찰에서 마을로 이동되었다. 조선시대의 『新增東國輿地勝覽』, 『輿地圖書』등의 지리지를 통해 당대에 존재하고 있던 영당의 분포와 건립 경향의 변화상을 살펴 이러한 변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조선중기 이후 예학자들의 문집에서는 영당 제도에 대한 당대의 논의와 고민을 확인할 수 있으며, 영당 건립 과정의 기록을 상세히 남겨놓은 일기류의 문헌을 통해 당대의 인식을 살펴볼 수 있다. 조선중기를 전·후로 뚜렷이 변화된 영당 건립의 경향과 당대 예학자들의 논의를 통해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초상 봉안과 제향 전통의 맥락이 보다 면밀히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Author(s)
배창현
Issued Date
2021
Type
Article
Keyword
영당조선중기예학신증동국여지승람여지도서
DOI
10.7738/JAH.2021.30.4.017
URI
https://oak.ulsan.ac.kr/handle/2021.oak/8793
https://ulsan-primo.hosted.exlibrisgroup.com/primo-explore/fulldisplay?docid=TN_cdi_nrf_kci_oai_kci_go_kr_ARTI_9859171&context=PC&vid=ULSAN&lang=ko_KR&search_scope=default_scope&adaptor=primo_central_multiple_fe&tab=default_tab&query=any,contains,%EC%A1%B0%EC%84%A0%EC%8B%9C%EB%8C%80%20%E5%BD%B1%E5%A0%82%EC%9D%98%20%EA%B1%B4%EB%A6%BD%20%EA%B2%BD%ED%96%A5%EA%B3%BC%20%E7%A6%AE%E5%AD%B8%ED%99%95%EC%82%B0%20%EC%9D%B4%ED%9B%84%EC%9D%98%20%EB%B3%80%ED%99%94&offset=0
Publisher
건축역사연구
Location
대한민국
Language
한국어
ISSN
1598-1142
Citation Volume
30
Citation Number
4
Citation Start Page
17
Citation End Page
29
Appears in Collections:
Engineering > Architectural Engineering
공개 및 라이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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