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시대 진한(辰韓)지역 취락연구
- Abstract
- 이 연구는 신라 취락의 중요한 모태가 되는 진한지역 취락에 주목하여, 사로국과 주변 소국들의 취락 양상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고고학과 문헌 자료 등을 활용하여 취락의 협의적 측면과 광의적 측면에서 진한지역 취락연구를 진행하였다. 먼저, 취락의 협의적 측면에서는 진한지역 주거지의 형성과 변천, 그리고 새로운 주거문화의 기원과 출현 의미 등을 밝히고자 하였다. 취락의 광의적 측면에서는 취락의 다양한 구성 시설들을 검토하여 진한 취락의 성격과 구조, 그리고 전개양상을 검토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진한지역의 읍락(邑落)과 국(國)의 양상에도 접근해 보았다.
진한지역 취락의 시기는 Ⅰ~Ⅳ기로 구분된다. Ⅰ기는 원형점토대토기를 표지로 하며, 연대는 기원전 4세기 후엽~기원전 3세기이다. Ⅱ기는 삼각형점토대토기를 표지로 하며, 연대는 기원전 2세기이다. Ⅲ기는 전기와질토기를 표지로 하며, 연대는 기원전 1세기 전엽~기원 2세기 중엽이다. Ⅳ기는 후기와질토기를 표지로 하며, 연대는 기원 2세기 후엽에서 4세기 초 · 전엽이다.
진한지역 주거지는 생활면의 위치에 따라 크게 수혈주거지와 지상식 건물지로 구분된다. 삼한시대 진한지역은 청동기시대 이후 다양한 사회 변동 속에서 외래문화가 유입되면서 수혈 주거문화 또한 변화가 나타난다. 즉, 진한 형성기에는 기존 재지의 청동기시대 주거지와 외래의 이주민들의 주거지가 공존 및 혼재하거나 두 주거문화가 융합되는 양상을 보인다. 초기 원형점토대토기문화 단계의 주거 형태는 평면 원형계 또는 방형계에 무시설식 노시설을 갖춘 단순한 구조를 보이거나 부정형한 수혈의 형태가 많다. 이후 기원전 2세기의 삼각형점토대토기 단계에 들어서면 평면 방형계 주거지에 무시설식 노시설을 갖추 형태가 재지의 주거문화로 정착하게 된다.
기원전 1세기 전엽에는 새로운 문화 파동과 함께 남해안과 낙동강 수계를 이용하여 영남 내륙까지 연결되는 광역의 교역망을 통해 평면 원형계에 돌로 만든 구들 주거지가 울산 교동리유적과 대구 달성 평촌리유적에 유입된다. 원형계 주거지내 돌로 만든 구들시설은 점차 지역의 환경과 여건 등에 맞게 점토를 이용해 만들면서 재지의 주거문화로 성행하게 된다. 기원 2세기 후엽에는 경주 황성동유적을 중심으로 새롭게 평면 방형계 주거지가 출현하여 영남 중부와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확산되면서 성행하게 된다. 기원 3세기 중 · 후엽에는 진한과 변한의 주거지가 뚜렷하게 분화되기 시작하고, 영남 중부와 동부, 그리고 영남 서부와 남해안지역권으로 구분되는 주거문화의 지역성이 나타난다.
진한지역에 새롭게 확인되는 방형계 4주식 주거지는 삼국시대 주거지 자료와 함께 종합해 볼 때, 벽주혈의 유무에 따라 4주식과 4주+벽주식 주거유형으로 구분된다. 이 두 주거유형의 각 지역권별 주거양상과 분포양상 등을 종합해본 결과, 4주식의 방형계 주거지는 주로 영남 서부와 남해안 지역에 분포권을 형성하고 있으며 마한 · 백제계 주거문화에서 영향을 받은 주거유형으로 추정된다. 반면, 4주+벽주식 방형계 주거지는 영남 중부 및 동부지역에서 주 분포권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당시 이 지역을 중심으로 성행했던 주거유형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3세기대 자료로 미루어 보아 호남지역보다는 호서지역과의 관련성이 엿보인다. 특히, 경주 황성동유적에서 4주+벽주식 방형계 주거지와 유사한 형태가 확인되는 시기는 3세기 중 · 후엽으로, 이 시기에 신라 사로국은 호서의 마한지역과 상호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교역과 교류 등이 이루어진 양상이 여러 물질자료를 통해 확인된다. 3세기 중 · 후엽부터 진한과 변한 지역의 주거 형태가 분화되는데, 그 원인과 배경은 진한이 마한과의 네트워크와 상호 교류 등의 관련 속에서 방형계 4주식 주거 문화를 수용한 부분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지상식 건물지는 바닥의 위치에 따라 지면식과 고상식으로 구분된다. 고상식 건물지는 Ⅰ~Ⅲ기까지는 1×1칸 고상식 구조가 주류를 이루며, 취락 내 축조 빈도율은 높지 않다. Ⅳ기에는 1×1칸, 2×1칸, 2×2칸 등 고상식의 구조가 다양해진다. 지면식 건물지는 주로 Ⅳ기에 유행하며, 벽주식, 4주+벽주식 등 수혈주거지의 기둥배치와 유사한 형태, 열쇠모양을 한 대규모의 특수한 형태 등 다양한 형태가 출현한다. 지상식 건물지는 일반 가옥, 수장층 가옥, 창고, 공동 의례나 집회 등을 위한 특수 건물 등 취락내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진한지역 취락의 유형은 크게 중심취락, 주변취락으로 구분된다. 중심취락은 다시 상위취락과 하위취락으로 세분되며, 주변취락은 기능과 성격 등에 따라 일반취락과 특수기능취락으로 세분된다. 진한지역 취락의 전개는 시기에 따라 형성, 정착, 변동, 분화와 발전으로 나타난다. Ⅰ기 취락은 원형점토대토기를 표지로 하며, 진한 취락의 형성기라 할 수 있다. 진한지역에 유이민들이 유입되면서 주거지, 분묘 등 기존 재지민의 문화와 공존 및 융합되는 양상이 확인된다. 분묘는 석관묘, 옹관묘 등 청동기시대부터 사용된 묘제 문화가 지속된다. Ⅱ기 취락은 삼각형점토대토기를 표지로 하며, Ⅰ기에 이어 계속해서 유이민들이 유입되어 소규모 단위의 취락들이 형성되고 정착이 이루어진다. 대체로 Ⅰ · Ⅱ기 취락은 의례 공간을 중심으로 취락 간 통합의 구심점을 형성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Ⅲ기 취락은 전기와질토기를 표지로하며, 취락이 이전 시기보다 성장하고 재편 · 변동되는 양상이 간취된다. 주거지, 분묘 등의 시설에서 새로운 문화요소가 출현한다. 주거지는 앞 시기 재지의 평면 방형계 주거지가 지속되면서 새롭게 평면 원형계에 부뚜막식 및 구들식 노시설이 설치된 주거지가 출현하며 확산되어 나간다. 분묘는 수장묘의 단독 조성과 그 하위 분묘군의 군집 축조의 양상이 보인다. 또한 울산 교동리유적, 울산 달천유적, 경주 황성동유적 등에서 중심취락과 특수기능취락이 조성되어 성장해 나간다. Ⅳ기 취락은 신식와질토기를 표지로 하며, 진한 취락이 분화와 발전되는 시기라 할 수 있다. 주거지는 부뚜막식 및 구들식 노시설을 갖춘 평면 원형계 주거지가 지속되면서 새롭게 평면 방형계 주거지가 출현한다. 특히, Ⅳ기에 이르면 울산 하대유적과 포항 옥성리유적 등에서 대규모 중심고분군의 조성, 울산 교동리와 경산 임당 유적에서 대규모 중심취락의 조성, 그리고 경주 황성동과 울산 중산동 유적 일대에 대규모 특수기능취락지의 조성 등을 통해 당시 읍락(邑落)(國)과 국의 다양한 변동과 변화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상의 각 시기별 취락을 통해서 볼 때, 읍락(邑落)과 국(國)의 변동 양상이 간취된다. Ⅰ · Ⅱ기 진한지역에는 개인 유력자가 확인되지 않은 점, 대규모 중심 취락이 확인되지 않은 점 등을 통해 당시 취락들은 소규모 읍락 단위로 존재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범위는 대략 5㎞로 추정된다. Ⅲ기에는 기원전 1세기 전엽을 기점으로 진한지역에 수장층의 존재가 확인되는 분묘가 조성되고, 중심취락과 그 주변에 특수기능취락 등이 출현하는 양상으로 미루어 소국(小國)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국(國)의 규모와 범위는 대국(大國)과 소국(小國)의 차이가 있고, 시기에 따라 고정적이지 않고 유동적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 범위는 대략 10~15㎞ 내외로 추정된다. 이 시기 중심취락으로 추정되는 울산 교동리 및 신화리 일대의 취락과 경주 탑동 목관묘군, 황성동 제철유적, 나정유적 등이 분포하는 경주 도심지구의 취락 자료를 통해서 볼 때, 당시 읍락이 하나의 단위 집단으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은 경제적 생산활동과 종교적 의식행사가 중요한 부분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 3세기 중 · 후엽에는 국읍과 단위 읍락 안의 상위와 하위 취락, 그리고 중심과 주변 취락과의 분포 정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국읍으로 추정되는 경주 월성지구와 경산 임당유적, 그리고 읍락의 중심취락으로 추정되는 울산 교동리유적의 사례로 미루어 보아, 상위 취락은 넓은 범위의 조망과 방어에 유리한 고지의 구릉지에 입지하고, 환호와 목책 등과 같은 방어 · 경계시설을 설치하고, 그리고 읍락 구성원들 간의 결속과 통합을 도모하는 종교시설을 갖추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위취락은 상위취락에 종속되어 유기적으로 주거역을 이루며, 상위취락의 중요한 경제적 기반이 되는 다양한 생업활동을 영위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중심취락의 주변에 분포하는 취락들은 보통 3~5㎞의 범위 내에 분포하며, 이들 취락 간에는 정치 · 경제 등의 중요한 사회 관계망(네트워크)을 형성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Author(s)
- 김나영
- Issued Date
- 2023
- Awarded Date
- 2023-08
- Type
- Dissertation
- Keyword
- 삼한시대; 진한지역; 수혈주거지; 지상식 건물지; 주거문화; 취락; 중심 취락; 주변취락; 읍락(邑落); 국읍(國邑)
- URI
- https://oak.ulsan.ac.kr/handle/2021.oak/12901
http://ulsan.dcollection.net/common/orgView/200000693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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