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民俗」としての 「靖國問題」
- Abstract
- 2001년 8월 13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8월 15일 일본의 종전(終戰)기념일을 앞두고 야니쿠니(靖國) 신사(神社)를 참배하였는데, 이는 일본뿐만 아니라 주변 여러 나라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다음해 봄에도 고이즈미 총리는 야스쿠니 신사를 예정에도 없이 기습적으로 참배해 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를 앞두고 한일 韓日 양국을 또 한번 놀라게 하였다. 이렇듯 일본에서는 매년 여름이 되면 총리나 각료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둘러싼 논쟁-이른바-이 각종 매스컴에 오르내리곤 했다.
이러한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둘러 싼 논쟁은 민속학(民俗學)의 입장에서 간과할 수 없는 두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는 야스쿠니신사에 모셔져 있는 에 관한 것이다. 이는 신사참배 논쟁의 중심이 되는 것으로 종전에 민속학이 연구대상으로 다루어 온 의 존재 여부를 둘러싼 것이다. 둘째는 총리 등의 공직자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것에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는 사람들이 야스쿠니 신사의 '전사자위령(戰死者慰靈)' 자체를 일본의 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이에 본고는 앞서 지적한 문제점 중 후자에 해당하는 것으로, 일부 일본인들에게 '전사자위령'이 일본의 으로 인식되는 현상에 관하여 역사적 논의를 바탕으로 규명하고자 한다.
야스쿠니 신사는 원래 경마나 스모, 가부키 등이 개최되는 동경의 명소(名所)였으나, 1916년경부터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영혼들을 위로하는 곳으로 변해갔다. 이는 일로 日露전쟁(1904)이후 발생한 수많은 전사자들에 대하여 일반인들의 장례나 명예에 관한 인식이 변한 까닭이다.
그 후 1932년 4월, 야스쿠니신사에서 큰 축제가 열렸는데 이때 애국심과 충성심을 나타내기 위한 교육의 일환으로 동경 지역 학생들의 집단 참배가 거행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나라를 위한 죽음이 슬픈 것이 아니라 명예로운 일이라는 것을 정부가 국민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한 일종의 '연출'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와 같은 관행이 약 5년 간 지속된 1938년 무렵, 일본 병사들 사이에는 "죽은 다음, 야스쿠니에서 만나자" 라는 말이 퍼지기 시작했고, 또한, 신사 참배와 관련된 노래가 유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은 어느덧 일본 국민의 가슴 속 깊이 하나의 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급기야 1941년부터 4년에 걸친 태평양전쟁에서는 213만 명의 '야스쿠니 제신(祭神)'을 만들어 내기에 이른 것이다.
즉, '전사자위령'의 존재는 현재 행해지는 의 새로운 개념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고, 이것을 일본의 으로 정당화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는 것이 논자의 결론이다.
2001년 8월 13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8월 15일 일본의 종전(終戰)기념일을 앞두고 야니쿠니(靖國) 신사(神社)를 참배하였는데, 이는 일본뿐만 아니라 주변 여러 나라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다음해 봄에도 고이즈미 총리는 야스쿠니 신사를 예정에도 없이 기습적으로 참배해 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를 앞두고 한일 韓日 양국을 또 한번 놀라게 하였다. 이렇듯 일본에서는 매년 여름이 되면 총리나 각료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둘러싼 논쟁-이른바-이 각종 매스컴에 오르내리곤 했다.
이러한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둘러 싼 논쟁은 민속학(民俗學)의 입장에서 간과할 수 없는 두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는 야스쿠니신사에 모셔져 있는 에 관한 것이다. 이는 신사참배 논쟁의 중심이 되는 것으로 종전에 민속학이 연구대상으로 다루어 온 의 존재 여부를 둘러싼 것이다. 둘째는 총리 등의 공직자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것에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는 사람들이 야스쿠니 신사의 '전사자위령(戰死者慰靈)' 자체를 일본의 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이에 본고는 앞서 지적한 문제점 중 후자에 해당하는 것으로, 일부 일본인들에게 '전사자위령'이 일본의 으로 인식되는 현상에 관하여 역사적 논의를 바탕으로 규명하고자 한다.
야스쿠니 신사는 원래 경마나 스모, 가부키 등이 개최되는 동경의 명소(名所)였으나, 1916년경부터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영혼들을 위로하는 곳으로 변해갔다. 이는 일로 日露전쟁(1904)이후 발생한 수많은 전사자들에 대하여 일반인들의 장례나 명예에 관한 인식이 변한 까닭이다.
그 후 1932년 4월, 야스쿠니신사에서 큰 축제가 열렸는데 이때 애국심과 충성심을 나타내기 위한 교육의 일환으로 동경 지역 학생들의 집단 참배가 거행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나라를 위한 죽음이 슬픈 것이 아니라 명예로운 일이라는 것을 정부가 국민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한 일종의 '연출'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와 같은 관행이 약 5년 간 지속된 1938년 무렵, 일본 병사들 사이에는 "죽은 다음, 야스쿠니에서 만나자" 라는 말이 퍼지기 시작했고, 또한, 신사 참배와 관련된 노래가 유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은 어느덧 일본 국민의 가슴 속 깊이 하나의 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급기야 1941년부터 4년에 걸친 태평양전쟁에서는 213만 명의 '야스쿠니 제신(祭神)'을 만들어 내기에 이른 것이다.
즉, '전사자위령'의 존재는 현재 행해지는 의 새로운 개념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고, 이것을 일본의 으로 정당화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는 것이 논자의 결론이다.
- Author(s)
- 室井康成
- Issued Date
- 2002
- Type
- Research Laboratory
- URI
- https://oak.ulsan.ac.kr/handle/2021.oak/5440
http://ulsan.dcollection.net/jsp/common/DcLoOrgPer.jsp?sItemId=000002024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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