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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재이(災異) 발생에 대한 국가적 조치와 그 정치적 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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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재이는 민들의 생명과 생업에 영향을 줄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왕실과 국운의 장래와 결부되므로 재이에 대한 책임을 통치자에게 물었다. 국왕은 이에 대해 조치를 취하였다. 같은 자연 이상 현상이 발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후속 조치를 취하는 경우도, 취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후속 대응 유무의 차이는 비일상적인 현상이 인간사회에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인식한 것에 따른다. 그러므로 본 연구에서 국가의 대응 조치가 행해진 재이 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재이에 대한 국가적 조치는 두 가지로 구분하였다. 실질적 조치는 재이로 인해 직접적 피해를 입은 민들에게 내리는 구제 대응으로서 진휼과 조세감면, 위로, 권농 정책이 이에 해당한다. 반면 상징적 조치는 반성하는 행위를 보여주는 우회적인 대응 정책이었다. 예시로 사면, 사열, 공사 중단, 기우제와 같은 제사 등이 있다.
이들을 다시 시기별로 구분하여 각 시기마다 재이 조치의 양상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확인하였다. 신라 상대의 이사금시기는 대부분 농사에 피해를 끼치는 가뭄과 수해에 대해 재이 조치들이 시행되었다. 이전보다 강화된 왕권을 보인 마립간시기에는 감선과 천거 등 국왕이 주도적으로 조치를 취하는 양상도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재이 조치가 소지마립간의 왕경 정비 정책 이후에 나타나고 있어 재이 조치의 양상 변화는 일련의 왕권 강화를 위한 노력과 관련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진평왕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진평왕이 연호를 제정한 이후부터 재이 조치가 실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의 두 국왕이 실시한 재이 조치의 시기를 통해 왕권 강화의 노력과 재이 조치의 시행이 연관 있음을 알 수 있다.
강력한 왕권을 누리던 신라 중대에는 재이 조치의 실시 빈도가 늘어날 뿐만 아니라 이변 현상에 대해서도 재이 조치를 시행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재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확산, 강화된 결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이 조치는 선택적이었다. 4명의 국왕들이 실시한 재이 조치 사례를 통해 시행해야 했던 정치·사회적 배경을 살펴보았다. 모두 왕권 강화 혹은 유지를 위한 방편으로 재이 조치를 실시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재이 발생이 계기로 작용하여 국왕의 시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거나, 당시 강조하는 충효사상을 한 번 더 부각하였다. 이를 통해 재이 조치의 정치적 기능을 확인할 수 있었고, 재이 사상이 정치사상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Author(s)
신지원
Issued Date
2022
Awarded Date
2022-02
Type
dissertation
URI
https://oak.ulsan.ac.kr/handle/2021.oak/10086
http://ulsan.dcollection.net/common/orgView/200000605255
Affiliation
울산대학교
Department
일반대학원 한국사한국문화학과
Advisor
전호태
Degree
Master
Publisher
울산대학교 일반대학원 한국사한국문화학과
Language
kor
Rights
울산대학교 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 받습니다.
Appears in Collections:
Korean History & Cultural Studies > 1. Theses (M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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